
2026 제주기후정의행진 거리 행진을 준비 중인 참가자들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미증유의 재난이었던 네팔 대홍수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9월 19일, 제주시청 일대에서 ‘2026 제주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 기후위기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예언이 아니라 폭염과 가뭄, 집중호우, 해수온 상승과 농어업 피해처럼 일상의 재난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제주의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300여 명의 시민과 노동자, 농민, 청소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기후재난의 시대를 넘어 기후정의의 시대로 나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기후정의행진은 2022년부터 이어져 왔다. 서울 등 다른 지역의 대규모 기후행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제주가 처한 구체적인 문제를 충분히 드러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섬이라는 공간적 조건 속에서 제주는 해수온 상승과 농어업 환경 변화, 가뭄과 물 문제 같은 기후재난을 직접 경험하는 동시에 제2공항, 신규 가스발전, 관광개발, 교통 등 굵직한 개발 의제와도 맞닥뜨리고 있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은 행진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제주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시민들이 직접 성토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행사는 오후 1시부터 제주시청 민원실 맞은편 도로에서 시작됐다. 오후 3시 본 거리 행진에 앞서 제주지역 시민 사회 단체들이 마련한 총 18개의 체험·홍보 부스가 거리에 들어섰다. 참가자들은 각 단체가 다루는 환경·노동·농업·에너지 현안을 살펴보며 행사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가장 활기를 띤 곳 가운데 하나는 벼룩시장 부스였다. 참가자들이 조금씩 모아온 물건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공룡 장난감부터 고이 간직하던 위스키까지, 물건의 종류도 참가자들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했다. 잠시 기후행진 현장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활달한 작은 장터의 풍경이 펼쳐졌다.
다른 부스들도 저마다의 특색을 뽐냈다. 특히 퀴즈 형식으로 진행된 프로그램들이 눈에 띄었다. 민주노총 제주본부 부스에서는 메가프로젝트 관련 퀴즈가 마련되었고, 제주녹색당 부스에는 탄소배출과 에너지 사용량이 가장 높은 건물이 어디인지 묻는 퀴즈판이 세워졌다. 어느 건물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지 고심하는 아이들의 진지한 눈빛도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피켓들이 부스에 놓인 모습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행사장에 삼삼오오 모인 참가자들의 손에는 각자가 준비한 피켓이 들려 있었다. 저마다의 문제의식이 담긴 문구가 거리 곳곳에 등장했다. 누군가에게 기후위기는 에너지 전환의 문제였고 생명존중의 윤리였으며, 누군가에게는 농업과 생계의 문제였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성을, 후속 세대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같은 기후위기를 두고도 각자가 체감하는 피해와 문제는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가 오히려 ‘기후정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기후위기는 모두에게 똑같이 닥치지 않으며, 대응 과정에서도 비용과 희생이 특정한 사람과 지역에 집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행진은 서로 다른 현장에 흩어져 있던 문제의식을 한자리에서 연결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올해 제주기후정의행진이 제기한 의제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조직위원회는 제주 제2공항 계획의 백지화와 공장식 축산 폐지, 제주 바다의 해양보호구역 확대와 관리 강화, 무분별한 도로 개설 중단과 대중교통·자전거·보행 예산 확대를 요구했다. 여기에 신규 가스발전소 건설과 40MW AI 데이터센터 추진의 중단·재검토, 생태환경농업 확대를 통한 농민권리와 식량주권 보장, 중산간 개발 규제 강화를 통한 지하수 보전 주요 요구로 제시했다.
언뜻 보면 이 의제들은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공항과 발전소, 데이터센터, 축산, 교통, 농업, 바다와 지하수는 각각 다른 정책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날 한자리에서 각각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이들이 완전히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국면에서 제주의 자연과 지역사회에 어떤 부담을 더할 것인지, 그리고 그 부담을 누가 떠안게 될 것인지라는 질문이 모든 의제의 밑바탕에 놓여 있었다.
조직위원회는 앞서 9월 4일 기자회견에서 “제주를 불태우는 폭주를 멈춰라”라고 요구한 바 있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면서도 온실가스 배출과 개발 압력을 키울 수 있는 사업들이 동시에 추진되는 현실을 더는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날 거리에서 나온 목소리 역시 특정 사업 하나의 찬반을 넘어, 기후재난 시대에 제주가 어떤 발전과 전환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지구별키즈의 공연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부스 운영이 마무리 된 이후, 오후 2시 30분부터 열린 사전행사는 지구별키즈의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제주시청 조형물 앞에서 선보인 10분 가량의 공연이 끝난 뒤 사회를 맡은 사단법인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김정도 사무국장이 이번 제주기후정의행진의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제주가 마주한 다양한 기후위기 현안에 대한 발언이 이어졌다.

사전 발언 진행 중인 참가자들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강승희 언니네 본부장의 발언을 시작으로,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제주본부 임기환 본부장과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부미혜 활동가, 네팔 공동체의 수니따 블룬(Sunita Bulun) 씨까지 총 4명의 발언이 이어졌다.
강승희 본부장은 기후재난의 최전선에 농민들이 놓여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요즘 농가에서는 스프링클러와 호스를 설치해 밤새 물을 주느라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으며, 기후재난의 최전선에 서 있는 농민으로서의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이 자리에 참석했음을 밝혔다. 동시에 기후재난이 농민에게만 닥치는 현실이 아닌 노동자와 힘 없는 이들 모두에게 엄습하는 위기임을 함께 이야기했다. 왜 기후재난의 피해를 주요 배출국이 아닌 남반구의 사람들이 더 크게 짊어져야 하는지 되물으며, 기후정의의 실천에 여성농민회 역시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노총 제주본부 임기환 본부장은 메가프로젝트 비판으로 발언의 포문을 열었다. 재벌·대기업에게는 각종 특혜를 제공하면서 그에 따른 피해와 비용은 노동자와 민중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메가특구법은 주52시간 적용 예외를 통해 장시간 노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비판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다. 데이터센터 운영에 뒤따르는 막대한 전력과 물, 기반 시설의 부담은 결국 도민에게 그대로 돌아갈 수 있다며, 기업의 이윤을 위해 제주의 공유자원을 내어주는 방식의 개발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제주의 땅과 자원은 소수 자본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와 민중의 것임을 강조했다.
파란의 부미혜 활동가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 바다에 나가 보말을 잡던 기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수온 상승과 해양오염으로 보말이 현저히 개체 수가 줄어든 현실을 지적하며 무너져가는 제주 바다의 환경을 고발했다. 고수온과 저염수로 주저앉는 연산호, 낚싯줄에 고통받는 남방큰돌고래 등 기후위기와 인간 활동으로 훼손되는 제주 바다의 현실을 전하며 “기후위기의 최전선인 바다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제주는 제주일 때 가장 아름답다”며 정부와 제주도정이 개발보다 보호구역 확대와 보전 정책을 우선할 것을 촉구했다.
마지막 발언은 네팔 공동체를 대표해 참석한 수니따 블룬씨가 맡았다. 제주에 온 지 13년이 된 결혼 이민자임을 밝힌 수니따 블룬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네팔의 대홍수로 남긴 피해와 참상을 전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에서 고통과 슬픔의 크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혼자서는 피해 주민들을 많이 도울 수 없지만, 한 사람씩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어 주길 바란다며 피해 복구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부탁했다. 발언이 끝나자 현장에서는 긴 박수가 이어졌다.
이어 선언문 낭독이 진행됐다. 보물섬학교 9학년 김이수안 활동가와 최슬기 제주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국장이 제주의 기후재난을 넘어서기 위한 여덟 가지 요구를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정부와 국회가 기후재난보다 경제 지표의 하락을 더 우려하고, 기후재난을 새로운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삼는 구조를 멈춰 세우겠다는 선언문의 마지막 대목이 낭독되자 참가자들의 박수와 환호가 뒤따랐다.

바투카타의 길트기 공연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바투카타의 길트기 공연이 시작되었다. 경쾌한 타악기 리듬이 시청 거리를 가득 메웠고, 참가자들도 흥겹게 박수와 몸짓으로 화답했다. 바투카타를 선두로 수백 명의 시민이 제주시청을 출발해 거리 행진에 나섰다.

거리 행진을 진행하는 참가자들 ©기후자원정의센터 아크
참가자들은 피켓과 깃발을 들고 8대 요구를 구호로 외치며 제주시청에서 출발하여 광양사거리를 지나 이미애피부과 앞을 거쳐 다시 시청으로 돌아오는 길을 걸었다. 평소 자동차가 차지하던 도로를 시민들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가득 메웠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들의 행렬도 장관을 이뤘다. 근방을 지나던 시민들과 상인들도 밖으로 나와 행렬을 바라보았다. 행렬에 참여한 아이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광경에 화답하듯 어른 참가자들이 활짝 웃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행진 말미에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시청 앞에 다시금 도착한 참가자들은 사이렌 신호에 맞춰 일제히 도로 위에 누웠다. 다이-인은 기후위기가 먼 미래의 환경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다른 생명의 생존을 직접 위협하는 문제임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동이다.북적이던 행진 대열이 잠시 멈추고 사람들이 도로 위에 누운 순간, 거리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참가자들은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나마 도시 한복판의 분주한 리듬도 멎은 듯했다. 사이렌 소리가 그친 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각자의 표정에는 저마다의 결의가 묻어났다. 다시 제주시청 앞으로 돌아온 참가자들은 행사 전체 마무리 발언과 8대 구호 제창을 끝으로 이날 일정을 마쳤다.
우리는 기후재난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한 번의 행진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함께 걷는 일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9월 19일 제주시청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하루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제주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조금씩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